마틴 울프(Martin Wolf) -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위기(The Crisis of Democratic Capitalism)"
바야흐로 혼돈의 시대입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관세 발표와 유럽의 재무장 등을 보면 20세기 합리주의와 세계화에 기반한국제질서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Financial Times의 수석 칼럼니스트인 마틴 울프(Martin Wolf)의 책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위기(The Crisis of Democratic Capitalism)"는 꼭 한번 읽어보아야 할 필독서입니다.
이 책은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자본주의 간의 취약한 관계를 심도 있게 탐구하면서, 냉전 이후 세계적 공생과 번영의 기반이 되었던 두 시스템 간의 상호 의존적 관계가 현재 붕괴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울프는 역사적 분석, 경제 데이터, 정치 철학을 바탕으로 두 시스템의 체계적 실패를 진단하고, 민주주의 붕괴를 막기 위한 긴급한 개혁을 제안합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공생
울프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상호보완적인 반대 간의 결혼(marriage of complementary opposites)"라고 묘사합니다. 민주주의는 협력과 평등에 의존하는 반면, 자본주의는 경쟁과 불평등에 기반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경쟁과 혁신을 통해 부와 번영을 창출하는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통해 책임성과 분배 정의를 보장받으며 정당성을 유지합니다. 이러한 상호 의존성은 산업혁명 시기에 도시화와 교육 확대로 정치 참여가 증가하면서 등장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균형은 인류에게 전례 없는 번영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울프는 이 관계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긴장은 1980년대 이후 세계화, 기술 변화, 금융화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현재 위기의 원인
경제적 침체와 불평등
울프는 "구조적 장기 침체(secular stagnation)", 즉 지속적인 저성장과 생산성 저하를 주요 문제로 지목합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들은 임금 정체, 노동 소득 감소, 부의 집중 증가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경쟁보다는 진입장벽과 독점에 기반한 "렌티어 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로의 전환은 혁신보다는 정치적 영향력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구조를 강화하여 불평등을 심화시켰습니다.
정치적 기능 장애와 포퓰리즘
또한, 경제적 불안정은 민주주의의 후퇴를 초래했습니다. 이는 제도에 대한 신뢰 감소와 극우 포퓰리즘의 부상으로 나타납니다. 브렉시트, 트럼프 당선 등은 엘리트가 무능하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대중의 실망감을 반영합니다. 울프는 이러한 현상이 엘리트와 대중 간의 암묵적 거래가 붕괴된 데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즉, 정체된 임금, 탈산업화, 긴축재정이 노동자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주었고, 특히 코로나 위기 대한 대응이 보여준 무능은 체제에 대한 불신을 더 부채질 했다는 겁니다.
지정학적 위협
더불어, 중국의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는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구조적 도전을 제기합니다. 중국 모델은 국가 주도의 경제와 정치적 억압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키면서 서구식 민주적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모델을 제시합니다. 울프는 중국이 계속 경제적 번영을 이뤄낸다면, 민주적 자본주의가 글로벌 영향력을 상실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합니다.
울프가 제시하는 해결책
울프프는 투명성과 신뢰 회복, 공동의 희생을 통해 민주적 자본주의가 재건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특히, 엘리트들이 다시 공동의 선을 자신의 사적 이익보다 우선시하여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1. "새로운 뉴딜(New New Deal)"
울프는 새로운 뉴딜을 통해 사회 계약을 다음과 같이 재건할 것을 제안합니다.
- 광범위한 성장 회복: 녹색 기술, 인프라, 연구개발(R&D)에 대한 공공 투자.
- 불평등 완화: 누진세 도입, 노동권 강화, 독점 규제.
- 사회 안전망 강화: 보편적 의료 및 실업 보험 확대.
- 교육 개혁: 계층 이동성을 높이기 위한 대규모 교육 투자.
2. 민주주의 재창조
더하여, 포퓰리즘에 대응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제도 개혁을 촉구합니다.
- 선거 자금 개혁: 기업 및 암묵적 기부 제한.
- 선거제도 변경: 순위 투표제 및 비례 대표제 도입.
- 미디어 규제: 허위 정보 방지 대책 마련.
3. 글로벌 협력
울프는 기후 변화, 조세 회피, 무역 불균형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 협력을 강조하며 보호무역주의를 배격합니다.
책에 대한 비판적 관점들
울프의 분석은 깊이 있는 통찰로 찬사를 받지만 몇 가지 한계도 지적됩니다. 그의 구조적 장기침체 이론은 만약 저성장이 지속된다면 단순한 재분배만으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논란이 있습니다. 또한 자동화가 노동에 미치는 영향, 세계화된 경제에서 부유세 징수 가능성 등 구조적 문제점들을 과소평가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더불어, 엘리트가 주도하는 새로운 뉴딜과 같은 개혁들은 그가 애초에 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이 엘리트라고 지적한 것과 모순되는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울프는 민주적 자본주의가 결함이 있지만 여전히 인류에게 가장 적합한 시스템이라고 주장합니다. 나치 치하 오스트리아에서 탈출한 그의 가족사는 분명 그에게 문명의 취약성에 대한 인상을 남겼을 것입니다. 그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균형을 되찾지 못할 경우 민주주의는 마치 1930년대 파시즘의 등장과 같이 붕괴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짧은 덧글. 제 생각에는, 울프의 진단은 매우 예리하지만 처방은 상당히 나이브해 보입니다. 그동안 사적 이익을 추구하며 자본주의를 지대추구행위로 변질시켜온 엘리트들이 갑자기 공동선을 위한 희생을 하면서 제도개혁에 나설리는 만무합니다. 민주주의적 자본주의가 자생력을 가지려면, 사회 구성원들의 이기적 행위가 자연스레 공동선으로 연결되도록 하는 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도록하는 강력한 사회적 동력이 필요합니다. 그 실마리를 찾아내는지 여부가 21세기 뉴노멀의 양상을 좌우할 것 같습니다.